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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한과의 유래와 전통

by 부자엄마 조이스 2023. 6. 12.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과자를 한과류라고 한다. 본래는 생과와 비교해서 가공하여 만든 과일의 대용품이라는 뜻으로 조과류 또는 과정류라고 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줄'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외래과자와 구별하기 위해 한과로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한과의 유래와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과의 전통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한과의 유래와 전통
한과의 유래와 전통

 

한과의 유래

중국 한대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하여 한과라고도 불리웠다. 한과의 명칭과 관련하여 1996년 한국전래 제조사연구에서 언급된 바로는 조과류란 한자 표기에 대응하는 순 우리나라 낱말을 '질', '과즐', '줄'이라고 하여 왔다. 그리하여 한과류를 우리말인 과줄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果’란 말은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수로왕조에 처음 나온 말로 수로왕묘제수에 과가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수로 쓰는 과는 본래 자연의 과일을 의미하는데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곡분으로 과일의 형태로 만들었었다. 이때 과수의 가지를 꽂아서 제수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한과류는 ‘엿’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뚜렷한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귀족 중에서 애용되어 온 과자로 유밀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1763년경 성호사설에 조과가 제수로 쓰이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한과류는 농경문화의 진전에 따른 곡물의 산출증가와 불사조에서 오는 육식의 기피사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라, 고려시대에 특히 고도로 발달되어 제례, 혼례, 연회 등에 필수적으로 오르는 음식이 되었다. 특히 신라 진흥왕 33년에 팔관회가 처음 시작되어 계속적으로 국가적인 팔관회, 연등회 등의 행사에 상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미료로 기름과 꿀을 사용했으나 이 재료들을 응용하여 조과류가 만들어진 것은 삼국통일시대 이후로 보인다.

 

한과류가 차에 곁들이는 음식으로 만들어지고 음다풍속이 성행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융성했기 때문이다. 숭불사조가 고조되었던 통일신라에서 음다 풍속과 육식절제 풍습이 존중됨에 따라 채소 음식과 곡류를 재료로 한 한과류가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 시대의 후기에는 다과상, 진다례, 다정모임 등의 의식이 형성되는데 이에 따라 한과류도 급진적으로 발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신문왕 3년에는 왕비를 맞이할 때 납폐품목으로 쌀, 술, 장, 꿀, 기름, 시 등이 있었다. 한과류에 필요한 재료가 있었으므로 한과류를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문헌의 기록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충렬왕 8년에는 왕이 충청도에 행차했을 때 도중 유밀과의 봉정을 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왕 행차 때에는 각 고을이나 사원 등에서 유밀과를 진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유밀과는 납폐음식의 하나였다. 고려사 형법금령에 의하면 유밀과 성행이 지나쳐서 곡물, 꿀, 기름 등을 허실함으로써 물가가 오르고 민생이 말이 아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명종 9년과 명종 2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유밀과 대신에 나무열매를 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민왕 2년에는 유밀과의 사용금지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또한 고려는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살생을 금했던 만큼 육식이 절제됨에 따라 차를 마시는 풍속과 함께 한과류가 한층 더 성행하게 되었다. 한과류 중에서 특히 유밀과가 발달되어 불교행사인 연등회, 팔관회 등 크고 작은 행사에 반드시 고임상으로 쌓아 올려졌다.

 

유밀과는 국외에까지 전파되었다. 고려사에 충렬왕때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원나라에 가서 베푼 연회에 유밀과를 차렸더니 그 맛이 입속에서 슬슬 녹는듯하여 평판이 대단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까닭으로 몽고에서는 유밀과를 고려병이라고 했으며 고려병을 약과라고 하였다.

 

다식도 고려에서 숭상되어 국가연회에 쓰였었다. 유밀과처럼 일반화 되지는 않고 국가적 규모의 대연회에서나 쓰였던 것 같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면 한과류는 임금이 받는 어상을 비롯하여 한 개인의 통과의례를 위한 상차림에 대표하는 음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과류의 금지도 계속되어 대전회통에도 헌수, 혼인, 제향 이외에 조과를 사용하는 사람은 곤장을 맞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과류는 의례상의 진설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기호품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특히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반가에서 성행하였다.

 

한편 강정류는 민가에서도 유행하여 주로 정월 초하룻날 많이 해 먹었다. 민가에서는 강정을 튀길 때 떡이 부풀어 오르는 높이에 따라 서로 승부를 가리는 놀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한과류는 조선시대에는 일부에서 상품화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각 가정에서 직접 만들었고 이에 필요한 재료도 상비하고 있었다.

 

또한 한과류 중 약과, 다식 등의 유밀과와 강정류는 경사스러운 날의 잔칫상 차림에 높이 괴어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이는 반가를 중심으로 한과의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과 고임새가 빼어난 사람들이 초빙되어 그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아무리 전통이 깊고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현대인의 입맛에 맞지 않거나 혹은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여 응용하기 어렵다면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과의 경우 맛도 좋을뿐더러 차와도 잘 어울리는 특징이 있어서 지금도 가정에서 직접 만들기도 하고 오랫동안 그 맥을 이어오는 곳이 많다.

 

어렸을 때는 명절이 되면 주로 집에서 한과를 만드는 곳이 많았다. 여러번 손이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직접 재료를 손질하고 준비된 한과는 명절날 집에서 기름 냄새를 풍길 수 있는 먹거리였다. 그리고 현재에는 전통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후식으로 남아 있다.

 

한과의 유래와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과의 전통에 대해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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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0 적용함